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스터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1650년 9월 3일, 올리버 크롬웰은 [[던바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그러나 그는 전력 손실이 워낙 컸기에 스코틀랜드 원정을 중단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후 스코틀랜드 지도자들간의 마찰이 벌어졌다. 스코틀랜드군 사령관 데이비드 레슬리는 적이 [[스코틀랜드]] 내부로 깊숙히 쳐들어오게 한 뒤 섬멸시키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찰스 2세는 잉글랜드로 쳐들어가서 적을 물리치자고 주장했다. 결국 스코틀랜드 의회는 국왕의 뜻에 따르기로 결의하고, 1651년 8월 5일 14,000명의 스코틀랜드군이 국경을 넘어 잉글랜드로 진입했다. 찰스 2세의 의도는 전통적인 왕당파 지역인 랭커셔와 웨일즈 국경 지역을 행진하면서 군대를 증강시킨 후 런던을 향해 진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당파와 장로교 신자들이 그를 지지하기 위해 일어설 것이라는 그의 믿음은 잘못된 것이었다. 스코틀랜드군이 1648년에 잉글랜드 북부를 침략하면서 보여준 심각한 약탈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잉글랜드인들의 머리에 생생했고, 잉글랜드 의회는 국민들에게 반 스코틀랜드 감정을 더욱 자극하기 위한 효과적인 선전 운동을 펼쳤다. 데이비드 레슬리는 이러한 민심을 읽고 점점 더 침울해지고 비관적인 태도를 취했다. 8월 22일 [[우스터]] (Worcester)를 점령했을 때, [[찰스 2세]]는 왕에게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이 도시에서 최소한 1만 가량의 지원병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으나 정작 지원한 이는 2천 명도 채 되지 않았다. 또한 더비 백작과 토마스 틸드슬리 경이 이끄는 랭커셔 왕당파 세력은 8월 25일 위건에서 로버트 릴번 대령에게 패배했다. 틸드슬리는 이 전투에서 체포된 직후 처형되었고, 잉글랜드 내 왕당파 세력은 일소되었다. 한편, 크롬웰은 잉글랜드를 경유하는 진로를 택해 런던으로 진격하려는 적의 시도를 막았고 존 램버트 중장은 기병대를 앞세워 적의 후위대를 괴롭혔다. 크롬웰의 의도는 스코틀랜드와 왕당파를 섬멸하기 위한 거대한 병력을 집결시키는 것이었다. 크롬웰이 1650년에 스코틀랜드 침공했을 당시 그를 대신해 잉글랜드의 전반적인 군 통수권자를 맡았던 해리슨 소장은 뉴캐슬에서 진군하여 프레스턴 근처에서 램버트와 합류했다. 플릿우드 소장은 런던 주변의 의회 군대와 민병대를 동원한 후 워윅에서 크롬웰, 램버트, 해리슨과 함께 행진했다. 디브로우 소장은 남서쪽에서 파견된 부대를 소집했다. 마침내 찰스 왕세자의 우스터 주위에 집결하게 된 잉글랜드군은 약 28,000명의 병력을 집결시켰고 3,000명의 민병대 역시 스코틀랜드에 대항하여 동원되었다. 이리하여 찰스 2세의 런던을 향한 진군로는 모두 차단되었고, 릴번 대령의 군대는 적이 스코틀랜드로 돌아가는 길을 봉쇄했다. 이에 찰스 2세는 웨일스와 잉글랜드 남서쪽 지역에서 지원군을 모으기를 희망하면서 우스터의 방비를 서둘렀다. 우스터 주위를 흐르는 세번강과 테메 강을 가로지르는 주요 다리들을 부분적으로 파괴했으며 도시 주변의 요새들에 병력을 배치했다. 또한 찰스 2세는 전국 각지의 충신들에게 우스터로 달려와 자신을 구하라는 포고문을 발표했고 우스터에 거주하는 16세에서 60세 사이의 모든 남성들을 동원해 우스터 북쪽에 잇는 피치크로프트 평원에 배치시켰다. 그러나 찰스 2세의 선언에 응한 잉글랜드인이나 웨일스인은 극소수였고, 오직 스코틀랜드군만이 그를 여전히 따랐다. 그러던 9월 3일 크롬웰의 군대가 우스터에 도착하면서, 잉글랜드 내전 최후의 전투가 임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